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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보고서

보고서명한국 근현대 능력주의의 역사와 신화
  • 이 연구는 역사학과 사회학의 학제간 연구를 통해 한국사회에서 능력주의의 역사적 기원과 형성, 변화 및 현재성을 구체적, 실증적으로 연구하여 한국 능력주의의 특수성을 해명하고, 특히 지금까지 한국의 능력주의가 배제해온 것들에 주목하면서 사회적·역사적 대안을 모색하고자 했다.
    능력주의는 개인의 능력에 따라 경제적 소득과 사회적 지위, 정치 권력을 보상하고 분배해야 한다는 담론과 제도의 복합체라고 정의할 수 있지만, 다양한 실천과 제도를 포함하는 복합적 현상으로 등장한다. 현대 한국에서 능력주의는 개인 간의 무한 경쟁의 논리와 결합하여 ‘능력’ 외에 어떤 다른 기준도 인정하지 않는다. 약자에 대한 배려도 ‘공정’을 파괴하는 것으로 받아들인다. 능력을 평가하고 측정하는 방법으로서 시험이 절대화되며 시험의 승자가 특권을 독점하는 것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진다. 경쟁이 격화되면서 교육현장은 전장이 되고 모든 사람은 전사가 되어 시험을 통과하기 위해 싸워야 한다. 젠더와 세대, 계층 간 공정성에 대한 갈등은 더욱 더 격화되고 있다.
    능력주의는 불평등을 정당화하고 혐오와 갈등을 조장하여 민주주의의 기초를 파괴할 뿐 아니라 ‘사회적인 것’(the social)의 위기, 나아가 해체를 가져온다. 우리의 역사적 연구는 능력주의가 사회적인 것의 위기 속에 출현하고 강화되었으며, 위기를 더욱 심화시켰다는 것을 역사적으로 살펴볼 것이며, 이를 바탕으로 현실문제에 대한 대안을 제시하고자 한다.
    능력주의의 본격적 기원이 되었던 것은 ‘고시’를 통해 입신출세를 이루겠다는 수험만능주의였다. 기회균등이 노골적으로 제한된 식민지 상황에서도 노력과 절제로 성공을 이룬다는 입신주의는 교과서를 통해서 확산되었고 보통문관시험을 위시한 각종 고시에 많은 청년들이 응시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민족운동이 약화되는 1930년대 중반 각종 수험열이 급격히 확산되었던 바, 이는 ‘조선 사회’라는 연대가 약화되는 것을 배경으로 했다. 고립된 개인들의 분열된 욕망은 입신출세와 수험열로 수렴되었던 것이며, 이런 수험만능주의의 반대편에는 예술지상주의에 빠진 문학과 예술 청년들이 축적되고 있었다. ‘사회적인 것’의 약화, 시험의 절대화, 차별과 사회적 단절 등의 여러 현상들은 오늘날과 이 시기를 비교하게 하는 요인들이다.
    식민지기의 수험만능주의가 엘리트(혹은 엘리트 지향의) 청년들 사이에서 확산되었던 반면, 1960~70년대 들어서 압축적 근대화와 산업화 속에서 본격적인 능력주의 담론이 사회를 지배하기 시작했다. 극심한 경쟁과 노동 착취 하에서 진행된 한국의 개발은 불평등을 초래할 수밖에 없었고, 기회의 균등이라는 전제가 결과의 불평등을 합리화했다. 학교에서는 지능검사 등 평가와 측정장치들이 도입되어 ‘능력’을 수치화하였고, 기업에서는 과학적 인사관리의 제도가 도입되었다. 그러나 능력주의가 지배적 담론으로 등장하면서 능력주의 비판도 등장했다. 황금만능주의나 이기주의를 비판하는 목소리가 높아졌고 과도한 경쟁을 경계하는 목소리도 커졌다. 우수한 학생을 중심으로 하는 조기 교육을 주장하는 능력주의 담론에 대항해 우수한 학업 성취가 유리한 조건에서 이루어진 것임을 지적하고 학교가 현실적 불평등의 강화시키고 있음을 비판하는 목소리도 나타났던 것이다.
    능력주의에 대한 한국 사회의 인식 변화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대학생 집단이다. 1960~70년대까지 대학생들은 강력한 엘리트 의식을 가지고 있었고, 대학 졸업자가 가지는 사회경제적 우위도 컸다. 그러나 대학교육이 점점 확산되고 보편화되면서 대졸 학력이 문제가 아니라 어느 학교인지를 따지는 학벌주의가 지배하게 되었다. 사회적 책임의식이 약화되면서 명문대 학생들을 중심으로 하여 지위 상승의 욕구는 더욱 강화되었다. 대학의 서열화는 더욱 강화되었고 차별은 혐오와 함께 확산되었다. 학벌=능력이라는 인식은 불평등 완화를 위한 정책에 대한 반발과 약자에 대한 혐오로 귀결되었다. 오는날 대학생들은 자신의 수월성을 끊임없이 증명해야 한다는 신자유주의적 강박과 언제든 패배하고 탈락할 수 있다는 불안 속에 끊임없이 동요한다. ‘공정’해야 한다는 강박은 강하지만, 어떤 것이 공정한지에 대해서는 모호하다. 그러나 이해관계가 걸린 특정한 사항에 대해서는 매우 민감하게 반응하며 ‘공정’을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한국에서 능력주의는 기원부터 엘리트 지향적인 담론과 실천의 제체였다. 식민지기의 수험만능주의의 유행은 사회적인 것의 약화에서 기인했지만, 청년들을 더욱 사회로부터 단절시켰다. 근대화 과정에서 능력주의의 외연이 확산되었지만, 학교와 기업에서 능력주의는 소수를 위한 불평등의 합리화 기제로 작동했던 것이다. 21세기 신자유주의의 확산 속에서 능력주의는 사회의 약화가 초래한 불안과 공포를 감추는 역할을 하고 있다.
    이런 능력주의의 신화를 해체하기 위해서는 능력주의 자체가 갖고 있는 모순, 능력주의의 형성 경로에 대한 이해와 더불어, 능력주의의 외부에 대해 관심을 기울이는 것이 필수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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